채워지면 너로 인해
비워지는 내 가슴에
잡다한 일상사를
오늘도 털어 놓는
너에게
입술이나 바치는
나의 생은 무언가!
-이기라의 「자문自問 -술잔」은 삶의 쓸쓸한 내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화자와 마주 앉은 대상은 한갓 술잔에 불과하다. 술잔은 채워지고 비워지며, 그 앞에서 뭇사람들의 인생사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술잔을 앞에 두고, “너에게 / 입술이나 바치는 / 나의 생은 무언가!” 하며 자신을 향한 질책성의 반문을 한다.
결국 화자가 진정으로 만나야 하는 대상object은 누구인가? 그 대역의 방울 달아주기를 ‘술잔’에게 시도하였으니 …
그렇다. 남아에게 술잔보다 더 만만한 ‘너’가 또 어디 있겠는가? 산다는 것은 누구나 다 ‘너’라고 하는 대상에 입술을 바치는 일, 그것이 바로 범생凡生의 길이자 도생圖生의 길 아닐까? -(권혁모, 《동서문학》 2020. 가을호 계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