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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시래기 / 이기라

이동수 시인 2026. 5. 23. 15:12

 

고갱이서 밀려난 시퍼렇게 서러운 잎

항아리도 들지 못해 덧쌓이는 소외감을

줌줌이 타래로 엮여

뒷벽에서 달래는가.

 

젖은 몸 마르도록 떨며 보낸 추운 날들

만지면 바스러질 외로움만 남았어도

순수한 섬유질 뼈대

지켜 내고 있음이여.

 

 

-이 작품은 지난 9(2013) 이기라 시인이 낸 지푸라기 한 줌이라는 시조집에 실린 것이다. 그는 서두에서도 게으름 탓에 첫 시집을 낸 지 참 오랜만에 내었다고 겸손해하면서 겨우 한 됫박의 조밥을 지었다고 하였다. 요즘 먹거리에 조밥 엿볼 식객이 있겠느냐며 30성상 손에 쥔 것이 고작 한 줌 지푸라기 같다고 말을 줄이며 맺었다.

 시조 배추시래기에는 선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배춧잎의 한생이 매우 서글픈 색감으로 다가오지만, 잘 읽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하고 있다. 나름대로 삶에서 지조를 지켜 내며 온 것에 대해 긍정적이다. 밀려난 삶, 그래서 겪어야 하는 서러움, 소외감 이런 것들을 안으로 품고 달랜다. 떨며 보낸 인생길이었지만 순수한 섬유질 뼈대를 지켜온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푸른 배춧잎 같은 인생이 오히려 부럽기까지 하다.

 겨울철에 낯익은 소나무, , 바람, 배추시래기 같은 재료의 시조 작품을 읽어 보았다. 김종서, 성삼문의 지조와 기개, 정철의 시조에서 볼 수 있는 감각적 미학은 현금(現今)에 와서 이기라 시인의 시조 배추시래기에서 현대적 지조와 아름다움으로 다시 환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1976~7년 무렵, 류재하 시인이 손잡아 주셔서 내가 끼어들 수 있었던 삼장시동인, 벌써 30년이 훨씬 넘었다. 그때 선배 동인으로 활동하던 이기라 시인이었다. 얼굴을 직접 뵙지는 못하였지만 좋은 작품을 통해 시조를 배우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시집을 보내왔다. 그 당시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던 시조시인 두 분이 있었는데, 한 분은 유재영 시인이고, 다른 한 분이 바로 이기라 시인이었다.                                -(남진원, ‘애송 명시조 감상현대시조2013. 겨울호)